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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북 리뷰

마이크로스코프(Microscope)

by 에이밍 2020. 10. 24.

마이크로스코프 

Microscope


INFORMATION

 

언어 : 영어/한국어

저자 : 벤 로빈스 (Ben Robinson)

출판사 : lamemage (https://www.lamemage.com)

정발 : 이야기와 놀이 (blog.storygames.kr/)

 


 

 <마이크로스코프>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과장을 조금 보태 쓰나미(!)를 맞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TRPG와는 근본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보통 룰을 익히기에 바쁜 첫 플레이에서 그렇게 감탄한 적은 처음이었다. (플레이 후기는 이쪽)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험해봐야 할 룰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펀딩을 시작한 김에 도움이 될까 싶어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우선 <마이크로스코프>의 플레이 방식을 예시와 함께 간단히 설명하고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얘기한 뒤 앞으로 이 룰에서 기대되는 부분들을 얘기해보겠다.


 플레이 방식

 

 - 이하의 내용은 <마이크로스코프> 본편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 본문의 설명만으로 룰을 플레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본문에 사용된 용어는 임시로 번역한 것으로 이후 정발 용어로 수정합니다.

 

 <마이크로스코프>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한 뒤 그 세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룰이다. 역사라고 하면 굉장히 딱딱하게 들리지만 사실 역사의 본질은 이야기이다. 역사란 파편화된 사건들을 서사의 줄기로 꿰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룰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 그 자체인 셈이다.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재로 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스코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만들까? 크게 다음의 순서를 따른다.

 

1. 세계를 구축한다.
2. 역사의 처음과 끝을 정한다.
3. 역사의 중간 과정을 채우며 이야기를 만든다.

 하나하나 간단하게 살펴보자. (룰의 소개보다 감상이 궁금한 분들은 좋았던 점 파트로 넘어가 주시면 된다.)

 1. 세계를 구축한다

 

 우선 논의를 통해 세계를 구축한다. 논의 과정은 매우 간단한데, 이 세계에 존재해선 안 되는 금지 요소(Ban Ingredients)와 존재했으면 하는 추가 요소(Add Ingredients)를 정하면 끝이다. 이하의 예시는 임의로 작성했다.

 

금지 요소 추가 요소
용이 나오는 것 인공 도시
남성 중심 사회 여성 중심 사회
우주 밖의 세계를 다루는 것 신분 사회

 

 이렇게 되면 '여성 중심의 신분 사회로 이루어진 인공 도시'가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대륙의 형태나 종족의 구성을 고민할 필요 없이 서로의 호불호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의 트리거 요소는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욕망은 고스란히 수용된다. 플레이어들의 성향을 토대로 세계를 쌓아 올리는 것이다.

 즐거운 세션을 위해서는 서로의 트리거와 욕망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트리거와 욕망은 개인이 가진 가장 사적인 정보다. 설령 자리가 마련되어도 쉽게 입을 열기가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마이크로스코프>는 이 민감한 과정을 게임의 일부로 다룬다. 게임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경계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식인이나 근친 같은 요소에 민감하다면 그것들을 금지 요소로 제시하면 되고, 히어로물을 좋아한다면 히어로를 추가 요소로 제시하면 된다. 호불호의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키워드만 제시하면 알아서 그림이 그려진다. 밑그림은 준비되었으니 이제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을 맺는지를 채워나가면 된다.

 

 2. 역사의 처음과 끝을 정한다

 

 세계가 탄생한 직후에는 역사의 처음과 끝을 결정한다. 우리의 예시로 한번 만들어 보자. 기왕 성별이 키워드로 떠올랐으니 다음과 같은 내용은 어떨까?

 

처음 처음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지만 여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성이 상위 계층인 신분 사회가 시작되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성 혁명 사회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역사의 처음과 끝을 결정하면 이렇게 공백이 생긴다. 이제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현미경으로 세계를 들여다보자.

 

 3. 역사의 중간 과정을 채우며 이야기를 만든다

 

 플레이어는 역사의 처음과 끝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순서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로 채워나간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역사의 큰 줄기가 되는 '시대(Period)'를 만드는 것과 그 시대에 벌어진 '사건(Event)'을 추가하는 것, 그리고 사건의 디테일을 서술하는 '장면(Scene)'을 삽입하는 것이다.

 

 3-1. 시대(Period)의 설정

 

 시대(Period)는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새로운 여성 지도자 A가 탄생하다', '동성혼이 이성혼의 비율을 넘어서다', '역사적인 여성 혁명가가 사망하다'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태초와 종말을 엮어나가는 것이다.

 



 시대를 만든 뒤에는, 그 시대가 긍정적인 시대였는지 부정적인 시대였는지(Light or Dark)를 결정한다. 긍정적인 시대였다면 이후 지도자로 인해 나라가 번성했을 것이고, 부정적인 시대였다면 그로 인해 나라가 망했을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사건에 방향성을 매기다 보면 서서히 이야기의 물꼬가 잡힌다.

 

 

 3-2. 사건(Event)의 설정

 

 플레이를 하다 보면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눠보고 싶을 때가 있다. 새로운 여성 지도자가 개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같은 의문이 든다면 이제 현미경을 한 번 더 당길 때이다. 특정한 시대를 골라서 그 시대에 벌어진 사건(Event)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가령 '새로운 여성 지도자가 탄생'이라는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해보자. 플레이어는 여기에 '사실 그 여성 지도자는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여성으로 길러진 남성이었다'는 사건을 추가할 수 있다. 사건의 경우에도 Light/Dark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건을 계속 이어가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는 자신을 여성이라고 믿었지만,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은밀하게 미쳐가기 시작했다.' 는 식으로 말이다.

 


 사건을 만들면서 얻은 통찰로 새로운 시대를 삽입하는 것도 가능하고, 시대를 만들면서 얻은 힌트로 기존의 사건에 새로운 사건을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렌즈를 당기고 밀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조각하면 된다.

 

 3-3. 장면(Scene)의 설정

 

 그러나 사건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다. 특정한 사건의 디테일을 좀 더 파고 들고 싶거나, 궁금한 점이 생겼을 때에 추가하는 것이 바로 '장면(Scene)'이다.

 장면은 특정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것((State the question)으로 시작한다. 'A는 왜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했던 걸까?', 'A는 왜 여성으로 길러진 걸까?', '개혁을 일으킨 여성 지도자와 A는 정말 동일 인물인 걸까?' 같은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A는 왜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했던 걸까?'라는 질문으로 장면을 만들어보자.

 


  의문이 제시되면 플레이어들은 그 답을 찾기 위한 역할극을 수행한다. 해당 질문을 주제로 한 간단한 역할극을 여는 것이다. 이때 질문을 던진 플레이어는 역할극에 등장할 만한 인물을 제시한다. 이 예시에서는 'A', '그의 어머니', '그의 선생', '그의 친구' 같은 인물들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플레이어들은 여기서 각자 한 인물씩 맡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답을 찾아 나간다. 대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이벤트
왜 자신을 여성이라 생각?
A 난 여성이에요. 남성이 아닙니다.
선생 당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믿게 만드셨죠.
어머니 (회상 씬) 너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야 해. 이 세계는 그런 너를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
A 아뇨, 어머니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저 제가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입니다.
선생 당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A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아마 절 경멸하겠죠.
친구 (회상 씬) 너라면 이 세계를 보다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너는 신이 선택한 여성이니까.
A 나는 그녀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녀는 날 여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요.
선생 거짓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죠. 저라면 먼저 반기를 들겠습니다.



 실제 플레이는 이보다 훨씬 러프하게 진행된다. 역할극을 통해 '그의 어머니와 연인이 그가 여자이길 바랐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면, 질문자는 이 대답에 만족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결정한다. 만족하면 그것은 정사로 기록되고 (Dictating Scenes) 그렇지 못하면 다음번 토론이 열릴 때까지 수수께끼로 남겨진다. 

 


  이렇게 '시대(Period)'와 '사건(Event)', '장면(Scene)'을 무작위로 만들면서 게임이 진행된다. 그리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게임이 끝난다. 놀랍게도 세션이 끝날 때 즈음에는 하나로 뭉쳐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야기가 기승전결의 뼈대를 갖춘 드라마로 승화한다. 완성된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따라갈 때 느껴지는 경이로움은 플레이해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좋았던 점

 

 좋았던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부분 3가지만 얘기하고자 한다. 세 가지 모두 굵직한 장점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꼭 플레이해보길 권하고 싶다.

 

 신을 롤플레잉 하는 게임

 

 필자에게 <마이크로스코프>의 장르를 정의하라고 하면 '신을 롤플레잉 하는 게임'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신이란 전지전능한 무법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초월자를 의미한다. 거대한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신이 된 듯한 경이감이 느껴진다.

 

 보통 RPG에서 플레이어는 세계에 구속된다. 다양한 제약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자아 ㅡ 아바타를 굴리며 성장한다. 그러나 <마이크로스코프>에서는 역으로 세계가 플레이어에게 구속된다. 세계는 배경이 아닌 소재가 된다. 세계를 레고처럼 분해하고 합쳐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기존의 성장형 RPG와는 플레이 감각 자체가 다르다.

 

 이런 신성(神性)을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장면(Scene) 파트다. 장면 파트에서는 마치 신처럼 세계를 관망하던 플레이어들이 인간들 속으로 들어가 직접 역사 속의 사건을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 세계 밖에서 세계 안으로,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마음속으로. 현미경을 자유롭게 밀고 당기며 세계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신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신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 유구한 로망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는 지금까지도 숱하게 존재해왔다. 신이 되는 내용의 소설은 셀 수도 없이 많고, 대부분의 시뮬레이션 게임 또한 신의 관점을 구현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마이크로스코프>만큼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이 독보적인 플레이 감각 때문이라도 모두에게 한 번쯤 권하고 싶은 룰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 이 룰은 전지전능한 무법자로서의 신을 추구하는 게임이 아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절대적인 골든 룰이 하나 있다.

 

 간섭 금지(Don't collaborate) - 무조건적인 수용의 철학

 

 <마이크로스코프>의 골든 룰, 그것은 바로 간섭 금지(Don't collaborate)이다. 이 룰이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전지전능한 무법자가 아닌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모인 올림포스의 일원이 된다.

 

 마이크로스코프는 본질적으로 개연성을 엮어 나가는 게임이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이벤트를 쌓아 올리다가도, 게임을 끝내야 하는 시점이 되면 이벤트들 속에 내재된 개연성을 찾아서 엮어야만 한다. 문제는 사람마다 개연성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가 허용되면 그때부터는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그림이 왜 완벽한지를 서로에게 설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게임의 성격이 '가장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한 토론'으로 변한다. 룰이 아닌 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룰의 목적은 완벽한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있지 않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룰이 바로 간섭 금지다.

 

 플레이어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는 가진다. 때로는 앞뒤 얘기가 맞지 않을 것 같은 이벤트가 삽입되어도, 다른 플레이어가 삽입한 이벤트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무너져도,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선 안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정을 의도적으로 건너뛴다. 논의를 금지함으로써 역으로 상호 소통을 강화하는 것이다.

 

 상호 소통을 위해서는 논의가 당연히 필요한 것 아닌가 싶지만 <마이크로스코프>는 바로 그 점을 찌른다. 논의가 상호 소통의 성격을 가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상대의 의견에 대한 존중이다.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우선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완결성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목적을 우선시하면 좀 더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 쪽으로 이야기가 기울기 쉽다. 그러니 애초에 논의를 금지함으로써 상대의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는 과정을 먼저 거치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논의를 통해 합의를 구한다는 개념 자체가 기만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합의란 논의를 통해 옳고 그른 것을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수용을 통해 서로의 거리를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간섭 금지의 룰은 모든 플레이어를 동등한 입장으로 만든다. 개개인의 적극성에 관계없이 모두가 시나리오 라이팅 과정에 참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구현하다

 

 이야기는 고통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허술한 인과 관계를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두뇌가 토해낸 연상물이 바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개연성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불안증의 결과물이다.

 

 <마이크로스코프>는 그 지난한 과정을 게임으로 승화한다. 실제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무형의 과정을 메모지와 필기구를 이용해 구체화한 것이다. 거대한 줄기를 만들고 그에 따른 디테일을 무작위로 붙여간다. 특히 이 '무작위성'의 구현은 정말 훌륭하다.

 
흔히들 이야기를 만들 때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만들어보면 그렇지 않다. 마지막 장면부터 시작할 때도 있고 멋진 장면 몇 개에 의존해서 다발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도 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광활한 대지에 무작위로 뿌린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과 같다.

 

 <마이크로스코프>는 이런 창작의 카오스를 고스란히 수용한다. 모두 함께 무작위로 사건을 만들다 보면 어느덧 이야기가 완성된다. 질서정연하지 못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결과물은 더욱 경이롭다. 마구잡이로 뿌려둔 메마른 씨앗들이 미리 입을 맞춘 것처럼 꽃을 피우며 촉촉한 장관을 이룬다. 이야기가 스스로 꽃을 피우기 전까지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은 카오스를 나열하는 것뿐이다. 마침표가 찍히기 직전까진 '잘 만든 이야기'도 '성공적인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 그 자체다. 모든 이야기는 마침표가 찍히기 전까지는 혼돈 그 자체일 뿐이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다른 사람이 삽입한 이벤트 때문에 무너지고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혼돈을 수용할 용기가 조금 생겨난다. 혼돈을 받아들일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리하자면 <마이크로스코프>는 혼란스러운 서사 창작 과정을 게임의 형태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사람,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이란 반드시 플레이해보길 권한다.


 아쉬운 점

 

 개인적으로는 완벽에 가깝다고 느끼는 룰이지만 당연히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기존의 룰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호불호(전투의 부재, 캐릭터성의 부재) 같은 것보다는 룰 자체의 아쉬운 점에 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사견임을 재차 밝혀둔다.

 

 ROLE-PLAYING 게임으로서의 정체성

 

 함께 이야기를 만드는 룰로서는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ROLE-PLAYING 게임으로서 매력적이냐고 물으면 애매하다. 여러 번 플레이를 해봤지만 이 부분만큼은 매번 아쉬웠다.

 

 이 룰에서 롤플레잉을 즐길 수 있는 부분은 장면(Scene)을 만들 때뿐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장면 만들기는 <마이크로스코프>의 핵심적인 파트다. 실제로 역사 만들기 파트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개념 자체가 워낙 추상적이라 쉽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역할극을 통해서 문제의 답을 찾는다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생소하다. 숙련자의 경우에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처음 룰을 접할 땐 플레이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인물군'을 구상하기가 쉽지 않다. 즉석에서 바로 역할극을 하기도 쉽지 않고 다른 룰과 비교했을 때 롤플레잉의 재미를 느끼기에도 많이 부족하다.

 

 롤플레잉 자체도 좀 어려운 편이다. 질문을 던진 플레이어가 임의로 만든 캐릭터를 골라 그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데, 낯선 사람과 처음 세션을 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인물에게 몰입하기가 어렵다 보니 롤플레잉의 난이도도 높아진다.

 

 그럼에도 이 복잡한 방법을 채용한 것은, '간섭 금지'라는 골든 룰을 지키면서도 롤플레잉 게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토론이 아니라 역할극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답을 찾게끔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방법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진 좀 난해하다고 생각한다. 보완할 만한 시스템이 추가되면 좋을 것 같다. (아직 플레이해보지 못한 서플에서 보완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플레이하면서 좀 더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좋은 방법이 생기면 공유하도록 하겠다.

 

 시간제한의 필요성

 

 <마이크로스코프>는 기본적으로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다룬다. 그만큼 플레이 타임도 길어지기 쉽지만 플레이 타임에 대한 가이드가 딱히 없다. '원하는 만큼 플레이하고 끝내라(Play for as long as you want, then stop)'고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야기의 스케일이 워낙 큰지라 어지간히 플레이해서는 자연스럽게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레이하면서 벌려놓은 이야기를 수습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또한 누구는 슬슬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구는 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도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 플레이 타임이 한정적인 한국 사회의 특성상 느낌에 맡기기보다는 정확하게 시간제한을 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아니라 스케일 제한이라고 할 수 있겠다. 3시간 안에 완성하자 또는 3바퀴에 걸쳐 완성하자는 식으로 규모를 정해두는 것이다. 그럼 2/3이 되는 시점까지는 열심히 이야기를 벌리다가 남은 1/3 동안은 이야기를 수습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플레이할 수 있다. 끝이 언제쯤 올지에 대한 인식 없이 마구 이야기를 벌리다가 갑자기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타이밍이 오면 플레이어로서도 당황스럽다. 시간이 되었든 메모의 양이 되었든 스케일을 제한할 방법을 정해둘 필요가 있다.

 

 스케일을 제한하면 모두가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조금 대충이어도 일단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면 분량이든 시간이든 제한을 주는 쪽이 좋다. 스케일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좀 더 추가되면 좋을 것 같다.


 또 다른 가능성들

 

 개인적으로 <마이크로스코프>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룰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마이크로스코프>의 가능성에 대해서 몇 가지 적어보겠다.

 

 공동 시나리오 창작

 

 외국의 시나리오 업계에서는 이미 개인이 아닌 집단이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것이 디폴트다. 마블 시리즈가 대표적이고 디즈니를 비롯한 애니메이션도 여러 명의 시나리오 라이터가 팀을 이루어 이야기를 만든다. <마이크로스코프>의 게임적인 측면을 약간만 제거하면 함께 시나리오를 창작할 때에 유용하게 쓸만한 도구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미 비슷한 툴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다)  실제로 완성된 세션의 이야기는 바로 시나리오의 초안으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꼭 사용해보고 싶은 방법이다. 

 

 장편 TRPG 배경 설정

 

 장편으로 된 TRPG를 플레이할 때 PC들 간의 관계나 배경 서사를 마이크로스코프로 함께 만들고 시작하는 건 어떨까? 함께 만든 배경을 토대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유저의 몰입도는 물론이거니와 세션에 대한 애착도 보장될 것이다. 기본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만을 공유한 채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함께 하게 되었고 각자 어떤 서사를 가졌는지 공동으로 창작하여 고유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플레이하는 과정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플인 <마이크로스코프:탐사>의 세계 만들기(WORLD BUILDING) 파트에서 이 방법론을 지원하고 있다(!) 정발되는 김에 이것 또한 꼭 시도해보고 싶다.

 

 개인 시나리오 작업

 

 시나리오를 만드는 과정을 게임으로 풀어낸 룰인 만큼 혼자서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작성할 때에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룰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럿이 아닌 혼자서 하는 것이다 보니 게임성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고 단순히 툴로써만 사용하는 형태가 되겠지만, 그렇게 사용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시나리오 템플릿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후 새로운 게임을 작업하거나 개인적인 작품을 쓰게 될 경우 <마이크로스코프>의 문법을 활용해보고 싶다. 이 경우에는 혼자서 하는 것이니만큼 한 번에 다 끝내는 것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채워나가거나, 매번 특정한 단어를 랜덤하게 뽑아 그것을 주제로 카드를 채워나가는 형태로 즐겨도 좋을 것이다.

 

 

 이것 외에도 <마이크로스코프:탐사>의 실험(EXPERIMENT) 파트를 보면 다양한 응용 방법이 나와 있다. 환생한 인물의 삶을 다루는 환생(Reincarnation),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나눠서 플레이하는 분리된 역사(Divided History), 평행 세계를 다루는 평행 역사(Parallel Histories), 역사가 아니라 지역을 다루는 시간 아닌 영토(Territory Not Time), 여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여행(Journey), 세계가 아닌 한 사람의 삶에 초점을 맞춘 미시 역사(Micro-Histories), 별개의 사건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엮어나가는 엮인 사건들(Threaded Events),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여러 개의 시대를 다루는 메가 시대(Mega-Periods), 특정한 주제에 천착하는 긴 초점(Long-Focus)까지 <마이크로스코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필자 또한 아직 <마이크로스코프>의 세계를 모두 경험해보지 못했다. 정발을 계기로 다양한 방식으로 <마이크로스코프>를 즐겨보고 싶다. 이 후기 또한 언젠가 함께 할 플레이어들을 위해 쓰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태어날 이야기들을 기다리며

 

 <마이크로스코프>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룰 중 하나다. 펀딩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리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펀딩 종료일이 올 때까지 질질 끌다가 겨우 완성했다.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것과 달리 이 룰의 천재성을 표현하기에는 경험도 필력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를 계기로 <마이크로스코프>를 아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면 기쁠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하는 것이 좋아서 TRPG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룰을 찾아서 돌아다닌 것도 어느덧 3년이다. 룰이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는 늘 지대한 관심이 있고 이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한 TRPG를 계속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마이크로스코프>를 계기로 그동안 벼르기만 해왔던 룰 리뷰들도 차분히 써보고 싶다.

 결론은 게으른 필자가 룰 리뷰를 시작하게 할 만큼 <마이크로스코프>는 매력적인 룰이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사랑할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나 또한 앞으로 태어날 이야기들을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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