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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후기/더블 크로스

RE:HALOS : <블러디 미스트리스> 세노 릿카

by 에이밍 2023. 5. 8.

 

 드디어... 그녀가 왔습니다. (침착) 리헤로팟의 PC2이자 전직 빌런인 블러디 미스트리스, 세노 릿카입니다:D 릿카까지 오다니 감개무량ㅎ하네요ㅠ_ㅠ...만 말할 게 워~낙 많은 PC라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_T 

 뭐, 언제나처럼 잘 정제해서 써보겠습니다^0^ 제가 누굽니카 하하하하 레니워 PC1 출신아니겟음?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할 지라도 이겨낼 것입니다... 마침 부조리 얘기가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릿카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언제나처럼 공식(=담당 PL과 GM)의 허락 없는 망상성 동
인 해석이므로 내용의 진위는 공식에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번 후기에서는 릿카의 정신적 여정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그녀는 누구이며, 무엇을 바랐고, 어떻게 되었는가. 시작점은 역시 릿카의 테마인 '빌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하의 글은 <레니게이드 워> 캠페인의 전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 당신 말만 들으면 돼

만들어진 빌런

 

 릿카는 만들어진 빌런입니다. 빌런이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스터 코발트 밑에서 빌런 교육을 받았죠. 말하자면 '빌런의 윤리관'을 주입받았다는 뜻입니다. 

 

 

 빌런의 윤리관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저는 '수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수동성이라는 건 얌전하다는 의미가 아닌, '자신의 결핍에 대한 책임을 세상에 물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동성의 무서운 점은, 책임을 세상에 전가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은 무책임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스터 코발트의 악행은 대부분 이런 프레임에서 나왔지요. 최흉의 빌런을 만들어 질서를 무너뜨린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공식썰(?)에 의하면 코발트가 릿카를 훈육한 방법조차도 수동적인데요. 릿카 알아서 울음을 그칠 때까지 방치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나면 그제야 안아줍니다. 알아서 가스라이팅 당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죠.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만큼 아이의 존재를 부정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 나이 때에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방법이 우는 것밖에 없는데도. (곁가지로 하는 소리지만, 릿카는 타고나길 감정적 요구가 강한 아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뭘 하든 관심받고 싶어 하고, 충분한 피드백이 오지 않으면 크게 실망하고... 안 그래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딱 좋은 재질이었던 것.)

 

 어쨌든 이런 교육의 결과, 릿카는 '내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수동적인 윤리관 ㅡ 빌런의 마음가짐 ㅡ 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요구가 모조리 방치된 상태로 살아왔으니 뭘 요구하면 좋고 나쁜 것인지 가늠할 기준이 없습니다. 결국 권위에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물들게 됩니다.

 

 

 남편 손에 이끌려 영주의 성에 들어갔다던 괴담 속 중세 처녀처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빌런이 된 것이죠.

 


간만에 본다면... 반겨줄까?
아이돌인, 세노 릿카라면.

빌런이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릿카는 빌런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빌런의 삶밖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릿카가 대체 무슨 계기로 빌런 아닌 삶을 꿈꾸게 된 걸까요? 그 힌트는 릿카의 또 다른 페르소나인 '아이돌'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빌런의 역할은 사람들을 절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릿카가 흥얼거리면 사람들이 웃어요. 빌런의 삶만을 경험해 온 릿카에게 이런 경험은 정말 신선했을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릿카는 자신의 숨겨진 욕망과 조우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

 

 무엇보다 노래는 빌런이 아닌 릿카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어빌리티이고요. 모든 것이 미스터 코발트에게 종속되어 있는 릿카에게, 노래는 그녀만이 오롯이 전유할 수 있는 정체성이었을 겁니다. 릿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점점 물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빌런인 상태로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할 수가 없어요. 누가 빌런의 노래를 듣고 좋다고 해주겠어요? 노래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빌런은 아니어야 했어요. 그래서 릿카는 아이돌이 됩니다. 그 재능은 훌륭히 꽃을 피워서 최고의 아이돌이 되고 맙니다.

 

 미스터 코발트가 시키는 일을 윤리 없이 행하던 수동적인 자신에서,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랑받을 줄 아는 능동적인 자신으로 훌륭하게 변모한 것입니다. 릿카의 남은 인생에는 행복만이 내정되어 있겠지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러지 못합니다.

 

 

 어째서인지 릿카는 자격지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리고 빌런이었던 사실을 되씹으면서 끊임없이 고통을 누립니다. 평생에 걸쳐 당한 가스라이팅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만, 어쨌든 가장 바라던 꿈을 이루긴 한 것이잖아요?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하지만 릿카는 '성공했다'는 인식조차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아이돌이 되고 나서야 릿카는 자신의 진짜 욕망을 깨달아요.

 

 나 자신인 채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

 

 사랑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니었던 거예요. 세노 릿카만이 아니라 블러디 미스트리스로서도 사랑을 받아야만 했어요. '아이돌 세노 릿카'와 '블러디 미스트리스'가 분리된 채로는 자신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노 릿카와 블러디 미스트리스 사이의 간격이 넓을수록,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은 딱 그만큼 상처가 되어 돌아왔을 것입니다. 블러디 미스트리스는 여전히 빌런이며, 여전히 모두에게 사랑받지는 못하니까요. 발버둥 쳐서 들어온 어트랙션이 여전히 폐허인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은 굉장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진짜 히어로가 되어 블러디 미스트리스로서도 사랑받는 것입니다. 

 



난 이제 네 지시는 필요 없어

나한테 명령해

 

 하지만 히어로를 향한 릿카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합니다. 왜일까요? 이 글에서는 릿카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로 나눠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릿카 내면의 문제부터 살펴보죠. 이 문제의 징후는 팔라딘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자, 히어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걸까요? 하야토 후기에서도 말했듯 히어로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해요. 특히나 릿카는 빌런이었던 과거를 청산할 정도의 활약을 보여야 하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영웅이 되어야 해요.

 

 바로 그때, 하늘에서 완벽한 임무가 뚝 떨어집니다.

 

 

 팔라딘은 이 세계에서 가장 영웅의 정의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릿카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완벽한 입지의 인물이었겠죠. 그리고 바로 그 팔라딘이 릿카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넘버 원 히어로인 팔라딘에게 부탁을 받았다. 이건 릿카 입장에선 탁월한 가이드입니다. 이 임무를 해결하기만 하면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다. 아주 명확하고 간단한 처방이니까요.

 


 이후로 릿카는 나유타를 돕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합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봐요. 그리고 자신이 도망쳐 온 수동의 세계로 떠나려는 나유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고도 봅니다. 나유타가 가려고 하는 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근데 이거 좀... 꼬신 거 아님(????)


 하지만 릿카의 선의는 제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웅으로 거듭나지 못하죠. 하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팔라딘과 나유타의 소실 이후, 리헤일로즈의 멤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릿카만은 반응이 유독 다릅니다. 릿카는 (조금이지만) 흑화해 버려요.

 

 

 사람은 언제 흑화할까요? 어떤 일에 무 많은 기대와 마음을 걸었다가 실망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사실 잘 안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이 있었을 때입니다. 부담감 때문에 필요 이상의 노력을 했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은 절절함을 더해 절망감이 되지요. 

 

 왜 릿카만 유독 절망한 걸까요? '나유타를 구한다'는 문제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동해서 고통받는 인물은 릿카가 유일해요. 릿카가 멤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게 릿카가 팔라딘의 부탁을 명령으로 인식한 결과가 아닌가 해요. 

 

 

 사실 팔라딘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는 당위는 어디에도 없어요. 나유타를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끝날 뻔했지만) (어쨌든 팔라딘의 부탁을 받는 시점에선 몰랐던 일인) 하지만 릿카는 팔라딘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한 것을 무척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이 정도로 자책한다는 건 팔라딘의 부탁을 '반드시 해냈어야 하는 일'로 인식했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이 릿카가 무의식적으로 미스터 코발트의 명령을 팔라딘의 명령으로 대체한 결과가 아닌가 해요.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결과로 보상을 받는다는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미스터 코발트를 다시 만났을 때 플봇님이 쳐주신 스크립트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이제 팔라딘의 지시가 있으니까

 

 이전까지 릿카가 미스터 코발트를 대하는 자세는 '날 이렇게 만든 책임을 지게 하겠다'였어요. 하지만 팔라딘의 부탁을 받은 후로는 '넌 필요 없는 존재야'로 포지션이 미묘하게 바뀝니다. 팔라딘의 명령이 있으니 이제 미스터 코발트의 명령은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나유타의 소실로 임무에 실패한 후에는 미스터 코발트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잠깐이지만, 부분적으로나마, 미스터 코발트에게서 답을 찾고 있는 거예요. 씁쓸한 가설이지만 릿카는 오랜 가스라이팅 탓에 누군가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된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고
릿카는 무의식 속에 새겨진 이 프레임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그게 이 캠페인에서 릿카에게 주어진 과제였어요.

 


세노 릿카, 이 개체는 훌륭하다.
실로 '영웅'에 가깝다

넌 절대 영웅이 될 수 없어

 

 릿카의 문제를 팔라딘과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었다면, 릿카를 둘러싼 환경의 문제는 나유타와의 상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유타의 구원은 릿카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였어요. 빌런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죠. 하지만 이 망할 에우리디케는 자꾸 뒤를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혼자 지옥으로 돌아가요. 나유타가 릿카의 도움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릿카의 시련이 이렇게까지 어렵진 않았을지도요. 

 

 

 그럼 나유타는 왜 릿카를 거부하는 걸까요? 제가 딱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야 가장 큰 이유는...

 가오가 안 사니까.

 (...)

 

 아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돜ㅋㅋㅋㅋ 이것밖에 이유가 없어요(......) 네... 뭐... 릿카한테만큼은 도움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가만히 보면 요나랑 인섭의 도움은 은근히 군말 없이 받는 편이거든요. 하야토랑 릿카만 예외입니다. << 

 

 릿카가 보기에 나유타는 꼬마일 뿐이에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부분이 나유타를 아~주 빡치게 만드는 포인트지요ㅋㅋㅋ 저는 1부 마지막이나 되어서야 나유타가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 자존심을 대놓고 긁는 게 하야토라면 무의식적으로 긁는 게 릿카더라고요.

 

 물론 릿카는 나유타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을 겁니다. 진심으로 지켜주고 싶었을 거예요. 팔라딘의 부탁과는 또 별개로 정말로 나유타를 걱정했다고 봐요. 허나 나유타 입장에선 안 그래도 미숙한 남성성이 컴플렉스인데, 내심 호감이 있는 릿카가 자신을 지켜줘야 할 아이처럼 다루니 미쳐버리는 것이지요(ㅋㅋ)

 

 하지만 그런다고 여태 없었던 남성성이 갑자기 생기겠습니까? 남자로서 인식될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라도 인식되고 싶었을 거예요. 그 방법이 바로 릿카를 상처입히는 것이고요.

 

아주 그냥 나 너 좋아했다고 ㅈㄹ난리부르스 중

 

 그리고 릿카를 가장 아프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녀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할 권리를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릿카가 그토록 원하는 영웅이 되는 길을 차단시켜버리는 것이지요. 거절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릿카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목조목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이로 인해 적어도 '꼬마'는 아닌 존재로 릿카에게 각인될 수 있겠죠.

 

 하지만 나유타가 릿카를 우습게 봐서 이러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나유타는 릿카를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별의 단말의 판단에 의하면 릿카는 타고 난 영웅입니다. 

 

 

 (제 후기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유타는 애초에 영웅이 아니(?)고, 하야토는 자신이 있을 곳을 찾기 위해, 요나는 도망치지 않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인섭은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히어로가 되었지요. 하지만 릿카는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합니다. 바로 이 순수성이 나유타가 릿카를 동경한 이유일 것이고요.

 

 

 나유타는 머리가 복잡한 놈이에요. 별의 단말의 하드웨어로 쓰이다가 쇠할 운명입니다. 원치 않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과 비슷한 비극에 놓인 것이 릿카입니다. 하지만 릿카는 비극을 받아들일 동기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거침없이 움직여요. 가장 부조리한 존재인데 가장 단순하게 움직이죠. 이 얼마나 우아한지.

 

그건 세노 릿카니까 가능한 거야

 

 나유타는 영웅으로서 릿카를 동경했던 겁니다. 아마 그 시작은 팔라딘에게 릿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였을 거고요. 나유타는 세노 릿카라는 영웅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위로받는 독자였던 셈이죠.

 

이 기억은 제가 날조한 내용이긴 합니다만(..)

 

 하지만 이건 달리 말하면 나유타가 릿카의 삶을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릿카가 쳐들어와서 자신을 이야기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마우스를 클릭하며 좀비를 쏘아 죽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현관을 열고 들어와서 총을 쥐여주고 밖에 좀비가 들끓고 있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저능을 가장하며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는 나유타에게, 릿카는 현실을 보라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줍니다. 릿카는 정말로 도와주려고 한 거겠지만 나유타는 완전히 겁에 질렸을 거예요. 릿카를 거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겠지요. 

 

 즉, 인간적으로는 릿카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릿카의 말대로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서 나유타는 끝끝내 릿카의 모든 도움을 거절합니다. 둘의 상성이 이다지도 나빴기 때문에 릿카의 노력과는 별개로 그 시련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지요.

 



 나...
히어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목적어를 찾아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릿카의 욕망은, 타인에게 의존하는 방식밖에 모르는 그녀 자신의 한계와,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의 냉혹함에 가로막혀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니 릿카의 경우엔 이 세 가지를 모두 재고해야 합니다. 역으로 진행해 보지요.

 

 냉혹한 세계¹. 이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건 릿카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에요. 마지막 화에서 나유타가 별의 단말로 안온한 세계를 선택했다면 가능했겠지만 그리되지도 않았으니:) 아무튼, 이 가혹한 환경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릿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스터 코발트가 새겨놓은 수동적 사고 방식²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동문이 능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적어가 필요합니다. 릿카의 레니워는 이 문장에 걸맞은 목적어를 찾는 여정이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릿카가 찾은 오답은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릿카는 미스터 코발트를 위해 싸운다. (X)

 릿카는 팔라딘을 위해 싸운다. (X)

 릿카는 나유타를 위해 싸운다. (X)

 

 이 오답을 토대로 답을 찾아봅시다. 먼저 오답의 공통점을 찾아봅시다. 일단... 셋 다 나쁜 놈들(?)이군요. 그럼 좋은 사람을 넣으면 해결이 되려나요? 릿카에게 있어서 제일 좋은 사람을 예시로 넣어봅시다.

 

 릿카는 쇼지를 위해 싸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릿카의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려워 보여요. 쇼지가 목적어가 되어도 여전히 수동문처럼 읽힙니다. 그렇다면 나쁜 사람을 목적어로 삼은 게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쇼지까지 포함한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성격도 역할도 모두 다른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키워드는 하나, 바로 타인입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타인이 목적어가 되는 순간, 릿카의 삶은 수동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의 정답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릿카는 릿카를 위해 싸운다.

 

 릿카는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미스터 코발트 때문에 빌런이 되었고, 피스 덕분에 히어로를 꿈꾸게 되었고, 쇼지 덕분에 아이돌이 되었고, 팔라딘 덕분에 영웅이 될 방법을 찾았다고요.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릿카가 지금의 릿카가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릿카 덕분이에요. 릿카가 노력했기 때문에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용기를 냈기 때문에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고,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기 때문에 팔라딘에게 부탁을 받았던 거예요.

 

 남들이 백날 손을 내밀어봤자 그 손을 거절하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손을 잡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고, 이런 순간이 있을 때마다 용기를 냈기 때문에 릿카는 아이돌이 되고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막을 건너겠노라 결심한 건 그녀 자신입니다. 릿카는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되었던 거예요.

 

 

 그 어리고 나약했던 릿카를 구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요.

 


네가 있어주면 나도 괜찮아.

단 하나의 마음

 

 마지막 과제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³했던 릿카의 욕망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설령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이 문제도 원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릿카는 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걸까요? 아니, 사람들은 어떤 때에 사랑을 갈구할까요? 바로 자신의 존재가 희박해졌을 때입니다. 자신의 개성을 존중받지 못할 때, 그리하여 자신조차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타인의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러니까 날 사랑해달라는 말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달라는 뜻인 셈이지요. 사랑을 주는 것은, 그런 상대의 독자성을 알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행위인 것이고요.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거라면,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이 장면은 릿카가 아이돌도, 히어로도 아닌 릿카 그 자체로서 인정을 받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사실 릿카는 쇼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아이돌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해요. 릿카가 아이돌을 은퇴하고 나면 쇼지도 떠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요. 

 하지만 아니었던 겁니다. 쇼지는 릿카가 아이돌이라서 함께 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릿카의 노래에 이끌려 시작되었을지언정, 지금은 릿카 자체를 존중하고 있었던 거예요. 성애를 떠나서 이것은 사랑입니다. 릿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자신에 대한 답이에요.

 너는 그 무엇도 아닌 세노 릿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엔딩에 이르러서 릿카는 아이돌을 은퇴합니다. 그리고 세노 릿카로서 히어로의 삶을 시작해요. 이제 두려워할 것도 탐낼 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자신을 찾았으니까요.


 아이돌 세노 릿카도, 전직 빌런 블러디 미스트리스도, 히어로인 붉은 여왕도 아닌 세노 릿카를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세노 릿카의 행복을 기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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