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후기를 반드시 써야겠다고 생각한 세션인데 너무 늦었네요. 아무튼, 이 세션은 제 인생 원탑 세션이며 향후 몇년간을 바뀌지 않을 예정... 그래서 더 쓰기가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아무리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그 세션의 감동과 즐거움은 전달할 수 없을 테니까요ㅠ 그래도 마침 환혹이 다시 열린 걸 기념하여 후기를 써봅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미룰지 모르니까요!
본 시나리오는 아본님께서 마기카로기아의 리플레이집 '환혹의 노스탤지어'에 수록된 리플레이를 플레이어용으로 컨버전한 시나리오입니다. 즉 시나리오 집이나 사이트를 통해 구하실 수가 없어요. 오로지 아본님을 통해야만 플레이가 가능한 시나리오이고, 저는 정말 운좋게 그 파티에 들어가 세션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플레이한 캐릭터는 카야노 마리아. 직업은 사서에 기관은 호라이즌에 적을 둔 마법사로 겉으로의 모습은 히라노 세이치로라는 무사 가문의 도련님을 앵커로 삼고 있는 소녀 무사였습니다. 카야노 마리아는 제가 마기로기에서 제일 오래 그리고 많이 플레이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개인 서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 애착도 남다른 편인데 그 개인 서사를 많이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세션이었어요!
이번 시나리오의 배경이 1876년의 메이지 시대 도쿄이다 보니, 원래 현대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던 캐릭터가 과거 버전으로 컨버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앵커는 원래 앵커였던 히라노 다이치로의 선조(아닐 수도 있다) 가문인 도련님인 히라노 세이치로로 바꾸었고, 외모나 컨셉도 상당 부분을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런 미친 서사가 나올 줄은 몰랐죠. 아직도 환혹만 생각하면 크윽... (심장)
스포 없이는 후기가 불가능할 것 같아 이하 후기는 스포를 포함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나리오의 백미는 역시 시간의 흐름 표일 거예요.
허상서가에 수록된 몇몇 시나리오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이미 경험해 보신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게 마기로기 2번째 세션이었고 시간의 흐름 표를 사용한 것도 이 세션이 처음이었습니다. 세션 도중에 시간이 흐른다는 설정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지라 1사이클이 끝나고 시간의 흐름 표를 굴릴 때의 감각이 정말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더욱 충격적인 건 시간이 흐르면서 시즈도 변한다는 거였죠. 그냥 텍스트로 표현했으면 충격이 덜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날 세션에서는 아본님이 나이가 들어가는 시즈를 일러스트로 표현해주셨기 때문에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늙어가는 시즈를 눈앞에서 직접 지켜봐야했는데, 뭐랄까... NPC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정말 살아있는 캐릭터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늙어가는 시즈와 달리 마법사들은 늙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의자에 앉은 채로 혼자 몇년이고 흘러가버리는 시즈를 봐야해요.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게 단지 시간의 흐름 표를 사용했기 때문에 생기는 감각은 아니었어요. 이후에도 시간의 흐름 표를 사용한 세션은 몇 번 했지만 환혹의 노스탤지어가 특별하게 느껴진 건, 흘러가는 시간을 NPC가 체험하고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늙은 시즈는 자기 입으로 말해요. '늙고 싶지 않다'고. 그 욕망은 단순 텍스트가 아닌 진짜 위협으로 표현됩니다. 3사이클에서 플레이어들은 시즈가 서적경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든요. 늙지 않는 마법사를 사랑했기에 자신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래서 위험한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을 선택한 시즈가 너무 안타까워서 마음이 실시간으로 찢어졌습니다. 정말...
세션이 끝난 후 시즈의 일생 자체가 단 한 사람을 위해 성장하고, 사랑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요.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그 낭만적인 명제를 너무나 명료하게, 한편으론 너무나 잔인하게 표현하는 시나리오의 내공에 감탄했습니다. 이 시나리오의 목적은 단장을 모으는 게 아니에요. 시즈라는 사람의 인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지를 보여주는 시나리오죠.
하지만 이 세션은 시즈의 서사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엔 플레이어들의 개인적인 서사도 얽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션이 더욱 갓- 이기도 했고요.
PC1, 그러니까 원작의 싱킹 펜타곤의 역할을 맡게 되는 PC1은 시즈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사실상 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입니다. 시즈는 PC1의 손에 거두어져 그의 양녀로 성장하고 마침내 그를 사랑하기에 서적경이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저희 세션의 PC1은 마지막에 시즈와 함께 소멸하는 결말을 선택합니다. 그 소멸은 시즈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노코멘트에 가까웠고, 그것이 시즈를 위한 길이었다- 는 보다 깊은 서사로 이어지는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뉴욕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 발롱탕 분 역시 이 세션 출신입니다. 당시 이름은 발렌틴 본. 검은 숲의 은자. 플레이어들은 발렌틴의 스승에게서 '산산조각나는 저녁 놀의 이야기'라는 단장의 회수를 부탁받고 함께 하게 됩니다. 발렌틴은 워낙 잘 싸우기도 했지만 개인 서사도 잘 가져가서 마지막에 생각지 못한 감동이 있었고 이후 뉴욕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뭔가 짠하기도 했고요. 스승하고 그냥 장난만 치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의외의 키즈나를 보여줘서 함께 감정 이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발렌틴도 세션을 거치는 과정에서 성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우윗슈의 선조인 쿠로이와 타카시는 세션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 않게 종종 헨타이ㅋㅋ를 외쳐주시는 역할을 했고 덕분에 세션 분위기가 너무 우울하거나 너무 가볍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뭣보다 지금 이 후기를 타카시 플레이어분의 후기를 보며 되살리고 있어요(???) 감사합니다ㅎㅎ 넘나 자세하게 적어주신 것..* 당신이 이 후기의 아버지 (D.N.A)
마지막으로 제 PC인 카야노 마리아 역시 많은 성장을 이뤘습니다. 시간의 흐름 표라는 걸 사용할 줄 모르고 초기 앵커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뒀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 앵커도 함께 늙어가다 보니 개인 서사가 생기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개인적으로 너무 짠하고 또 아파서... 세션 내용 못지 않게 카야노의 서사도 마음에 남아서 이 세션을 더욱 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과거 동료였던 마법사를 잃고 폭주하여 미쳐 날뛰던 카야노를 구해준 것이 초기 앵커인 히라노 세이치로. 그는 무사 가문의 도련님으로 아직 무사도를 포기하지 못한 다른 가문과 달리 도쿄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진취적인 성격의 우자였습니다. 그런 히라노에게 거두어져서 호위 무사로 일하게 된 카야노는, 늙지 않는 모습으로 히라노의 곁에서 그를 지켜봅니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모습이 변하지 않는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죠. 나중에는 그림자 무사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히라노를 지키게 되지만, 어쨌든 히라노 역시 우자이기에 시간의 흐름 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카야노는 늙은 히라노의 곁을 지킵니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돌아갔을 때 히라노는 임종 직전의 상태였고 마지막으로 카야노를 보길 원합니다. 자신을 싫어하는 히라노 일족들의 시선을 이겨내며 히라노에게 다가갔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네가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였어요. (이건 실제로 게임 상에서 '의무'로서 해결하게 됩니다.) 카야노가 지켜보는 가운데 히라노는 편하게 눈을 감습니다. 카야노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병원에서 빠져나오고요. 그렇게 평생을 함께 한 초기 앵커를 보냅니다.
시간의 흐름이 시즈 한 명이 아닌 제 앵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시간이 흐른다는 게 얼마나 우자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인지 알게 되었고 더더욱 세션의 주제에 감정 이입이 되더라고요. 마법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자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마기로기의 세계관을 이 하나의 장치로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에 감탄하고 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환혹관'입니다.
세션의 진행상 카야노는 시즈와 시가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됩니다. 그 둘은 소멸했기 때문이죠. 환혹관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기억들을 보관하는 대법전의 장소입니다. 카야노는 그곳에서 과거의 동료들에 대한 기억을 보고 되찾습니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연출과 함께 지난 날의 기억을 보게 되죠. 제 시점에서는 마치 이 세션 내용 자체가 카야노가 환혹관에서 과거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덕분에 엔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어요. 흘러가버린 일을 돌이킬 순 없지만,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으로 마음 속에 영원히 보관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션이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서사는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환혹의 노스탤지어는 플레이어에게 그것을 100%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고요. 아직 이런 감각은 다른 룰이나 세션에서는 즐겨보지 못했기에 제가 아직까지도 마기로기를 붙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세션과 함께 나이가 들었고 앞으로도 늙어갈 생각이에요.
마스터링 난이도와 플레이 타임이 길어 여기저기서 돌아갈 수 있는 세션은 아니지만, 플레이가 어렵다면 리플레이만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후기를 쓰는 동안에도 중간 중간 울컥할 만큼 정말로 아름답고 아련한 세션이었어요. 인생 세션을 선사해주신 아본님, 그리고 함께 해주신 플레이어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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